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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아무생각

수리과학과 뉴스레터 기고 - 연구에서 얻은 소중한 가치

얼마 전 KAIST 수리과학과 측에서 학과 뉴스레터에 글을 기고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KAIST에서는 Undergraduate Research Participation 프로그램, 즉 URP 프로그램이라는 학부생 연구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생들의 적극적인 연구경험을 지원하고 있다. 많이들 URP의 P가 Program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는 하다. 나는 2019년 여름학기를 시작으로 6개월짜리 URP 프로그램을 2회 참여했고, 아직까지도 같은 연구그룹에서 교수님께 지도받으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나의 이런 경험을 토대로, 일종의 수기를 써달라는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수학과 학생들이 타과에 비해 URP 프로그램에 잘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학생들에게 URP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독려하는 취지로 연락을 주신 것 같았다. 수학과가 가지고 있는 특징도 있을 테고, 그보다 더 큰 것은 수학과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이러한 경향성을 보이도록 하는 것 같기는 하다. 아무튼 학과의 그런 취지도 나의 바람과 결을 같이하기에, 흔쾌히 수락하였다. 물론 뉴스레터에 글을 쓴다는 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만들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일찍이 연구를 접한 편인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강릉원주대학교 과학영재교육원에서 수치적분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연구를 했었고, 과학고등학교를 다닌 덕에 고등학생 시절 여러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내가 졸업한 강원과학고등학교는 "탐구논총"이라고 불리는, 1학년 학생들이 각 동아리에서 3명이 팀을 이루어 1년간 하나의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입학 직전에 신입생들이 학교에서 며칠 머물면서 일종의 OT를 하는 기간이 있었다. 하루는 한 학년 윗 선배들의 탐구 논총 발표회가 있었는데, PIPL이라는 물리 동아리 선배들이 비행기 날개의 circulation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PIPL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인상 깊게 접했던 연구였다 보니, 1학년 초반에 그 선배들의 연구 보고서를 공부(?)했었는데, 수학적 개선점이 보여서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이 수학적 개선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여 삼성 휴먼테크 대회에 제출해 보았다. 광탈했지만, 재밌고 좋았던 고등학교에서의 기억 중 하나가 되었다.

첫 연구를 해보니 뭔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붙었다. 아무래도 세기의 난제를 푸는것만이 연구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습시간의 대부분을 또 연구할 게 없을까 생각해보는 데에 할애했고, 위 연구를 포함하여 수학에서 2개 (탐구 논총, R&E), 물리 2개 (탐구 논총, 휴먼테크), 지구과학 1개 (선생님이랑 지질도 얘기하다가...) 총 5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게 되었다. 사실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과 가장 비슷한 건 지구과학 연구다, 2차원에서 3차원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니...

고등학교 때의 연구경험은 당시에 공부에 흥미를 키웠던 좋은 계기임과 동시에, 그 이후에 연구라는 장벽을 조금은 낮추어 보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학부시절 동안에도 여러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연구를 하며 보낸 시간은 학부시절 가장 소중한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아래는 KAIST 수리과학과 뉴스레터에 기고한 원고이다. 타인의 실명이 등장했던 부분은 적당히 고쳤다. 수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긴 하다만, 타 학문분야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니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20212월에 KAIST 수리과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이번 가을학기에 Yale대학교 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김동률입니다. 저는 2019년 여름/가을, 2020년 겨울/URP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KAIST 수리과학과 기하위상수학 및 기하군론 연구실에서 기하위상수학/저차원 위상수학 및 동역학계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URP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저의 연구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연구 경험은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 특히 학부생에게 아주 소중한 가치를 전달합니다. 학교 수업을 통해 제공되는 수학은 분명 중요하고, 필수적이며, 탄탄한 기본기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학부 생활을 채우기에는 수학은 무척이나 방대하고, 심오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을 듣고 시험을 잘 보는 것과 실제로 질문을 던지고, 깊이 사고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 사이에는 무시하지 못할 간극이 있습니다. 연구 경험은 우리에게 이 간극을 보여주고, 우리가 책과 수업을 통해 접하던 그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도록 합니다.

더욱이, 직접 연구해 보는 것은 수학을 공부하는 데에 좋은 동기부여가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 그것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에 대해 논하기엔 아직 걸음마를 갓 시작한 단계이지만, 수학은 우직하게 오래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학부 시절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봐서 좋은 성적을 받았던 관성에 이끌려 수학 공부를 이어나가기보다는, 우선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고, 사고의 큰 그림을 디자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부 저학년 시절, 코스웤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당시 정오의 수학 산책이라는 수학 세미나 시리즈에서 <동역학계의 섞임 성질>이라는 톡을 들었는데, 평소 접하지 못한 관점에 매료되어 동역학계를 공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관련 책과 논문들을 읽어보고, 세미나에 참석하여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2, 3차원 기하/위상수학과 거기에서 등장하는 동역학계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렇게 코스웤을 벗어나 관심사를 좇으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던 것이 연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URP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mapping class group (한 곡면이 가질 수 있는 orientation preserving homeomorphismisotopy class를 모아놓은 군) 위에서의 랜덤 워크의 동역학적 거동에 관한 연구를 접하면서였습니다. 위상수학, 확률론, 군론의 다양한 관점이 교차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흥미롭게 이해한 내용과 간략한 연구 계획을 준비하여 교수님께 URP 지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 관련된 영역의 다양한 결과들을 더 소개해 주셨고, 연구 방향을 구체화할 수 있는 조언을 주셨습니다.

URP의 시작은 제안서 작성입니다. 알려진 결과를 설명하고, URP를 통해 어떤 연구를 진행할 것인지, 그 계획을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당시에 새로운 발견이나 구체적으로 해결할 문제를 이미 갖고 있던 상황은 아니라서, 뭉뚱그려서 기술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연구 계획에 대한 타임라인도 작성해야 하는데, 사실 언제 무얼 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참석하려는 학회 일정을 기술했었습니다. 다른 학과 친구가 제안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니 주로 일련의 실험 시퀀스가 적혀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만 학교 측에서도 학과 특성을 어느 정도 고려하여 제안서를 심사하는 것 같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수학적 세팅을 상정하면서 연구에 본격적인 진척이 생겼습니다. 저는 우선 쌍곡기하와 군론에서의 도구를 활용하고자 특정한 두 개의 multitwists(곡면을 단순 폐곡선을 따라 뒤트는 변형) 생성되는 부분군에 집중했습니다. 2016년 랜덤 워크의 위상 엔트로피가 랜덤 워크의 탈출속도와 일치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랜덤 워크가 위 부분군에 놓여있을 경우 랜덤 워크의 번째 원소의 위상 엔트로피가 전체 랜덤 워크의 위상 엔트로피의 비율로 선형증가한다는 관찰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교수님과, 함께 연구하는 친구와 논의를 이어나가며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연구의 결과는 (arXiv: 2006.10420)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분산이 유한한 가정하에 위의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기댓값에 대한 아무런 조건 없이 랜덤 워크가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 특정 종류로 (pseudo-Anosov) 귀결된다는 것인데, 이는 한 곡면으로 만든 랜덤 3차원 다양체가 대체로 쌍곡기하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특정 세팅을 상정하기는 하였지만, 두 결과 모두 기존에 알려진 결과를 보다 약한 조건에서 증명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교수님과 친구와 훨씬 더 일반적인 상황에서 같은 결과를 증명하였습니다. (arXiv: 2103.13983)

URP 프로그램의 끝은 최종 보고서를 제출하고, URP 워크숍에서 발표하는 것입니다. 최종 보고서는 그동안 연구한 것을 정리하여 논문의 형태로 작성해 제출하는 것이고, 이를 워크숍에서 10분간 발표하게 됩니다. 워크숍에는 수학 전공자만 참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직관적이고 가시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URP 프로그램은 학부생이 연구를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유익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URP 프로그램을 통해 연구의 전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구 제안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알려진 것알고 싶은 것을 명확히 하고 연구의 개략적인 방향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 연구를 마무리한 후 URP 워크숍에서 발표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의 연구 결과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연구하기 전 아주 많은 지식과 사전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저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학부와 대학원 과목들을 모두 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본에 충실한 것은 필요하지만, 모든 과목을 들어도 부족한 것은 많으며 특정 연구를 하기 위해 모든 과목에서의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충실히 기본기가 쌓였다면, 관심사를 좇아 스스로 공부해 보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5학기 정도 공부를 마쳤다면, 관심이 있는 영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연구도 경험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연구를 경험하는 것은 아주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수리과학과 학부생 여러분들께서도 URP 프로그램을 통해 학부 시절 연구를 접해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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