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아무생각

나는 어쩌다 위상수학을 공부하게 되었을까

학부도 마치고, 이제 곧 떠날 때가 되니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범주가 넓어졌다. 최근에는 수학을 전공하는 학부 20학번 후배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여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학부 15학번인데, 나도 1~2학년 때 수학박사 유학을 앞둔 11학번 형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랬어서, 여러모로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다. 저맘때쯤의 내가 가졌던 고민이나 생각, 계획도 접했기에 나를 돌아보게 되기도 했고, 또 내가 저때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싶은 모습들도 접하니 응원하고픈 마음도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를 돌아보다 보니, 새삼 나는 어쩌다 위상수학을 (앞으로도) 공부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학부 2학년이 되면서, 학부 2~4학년 과목들을 두루두루 듣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1년간 수업을 들으며 내 관심분야를 좀 찾자는 다짐을 자연스레 가졌다. 마침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것이었기 때문에 타이밍도 좋다고 생각했다. 관심 분야를 찾고, 군생활 동안 스스로 공부를 좀 한 다음, 복학해서 3, 4학년 때 깊이 있는 공부나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2학년을 마쳐갈수록, 이걸로 관심분야를 찾겠다는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1년간 수학 각 분야의 핵심 과목들을 공부하면서, 다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Group, ring, field를 공부하며 5차 이상의 방정식은 근의 공식이 없음을 증명하면서 마무리되는 대수 과목에서는 group action을 통해 군이나 공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측도론 기반의 확률론을 공부하면서는 “확률”이라는 어떤 직관적인(?) 것과 유한 측 도공 간이라는 추상적인 것이 버무려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특히 피상적인 예시도 많으니 말이다. 저 차원 미분 기하를 공부하면서는 보일락 말락 하는 것과 이리저리 상상해보는 것이 재미있었고, 특히 유클리드 공간의 부분 공간으로서가 아닌, 공간 자체가 내재적으로 가지는 성질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적으면서 깨달은 건데 내가 학부 복소해석학을 안 들었구나...

아무튼 뭐 그렇다 보니 관심 분야는커녕 이것저것 다 재밌어 보여서 뭘 해야 하나 싶은 적도 있었다. 수학은 계속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원은 가고 싶은 데 가서 뭘 하지 싶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때 정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유학도 어느 정도 염두하는 입장에서, 학교를 정하거나 할 때 고려해야 하기에 일찍이 고민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중요한 계기가 하나 있었다. 나는 1학년 때 동역학계와 관련된 세미나를 들었는데, 그걸 좀 공부하고 싶어서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지식이 워낙 없어서 중간에 멈췄는데, 2학년 첫 학기를 마치면서 나름 학부 지식은 충분히 쌓인 것 같아 동역학계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동역학계에 더 흥미와 관심이 갔었고, 물론 다른 분야들도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단 하던 게 있으니 그대로 공부를 이어나갔다.

진짜로 중요했던 계기는, 내가 군대를 가기 직전인 17년 1~2월, 한 교수님께서 새로 부임하신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주로 저차원 위상수학과 기하위상수학을 연구하시는데, 관련된 동역학계도 연구하셨기에 나는 입대 전 교수님과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 교수님께서는 조언을 주시면서 몇 가지 구체적인 공부 방향을 제시해 주셨고, 군생활 동안 어느 정도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꾸준히 공부하게 되었고, 전역 후 복학을 하면서 관련된 대학원 과목들을 수강하기도 하고,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연구를 하다 보니 결과도 나오고, 사람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이어나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위상수학을 꾸준히 공부하게 되었고, 앞으로 박사과정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대학원 과목들은 대학원 위상수학, 복소해석학, 함수해석학, 확률론, 확률과정론 등을 들었던 것 같다. 사실 학부 2학년 때 “대학원 과목을 들으면 관심분야를 좀 알려나?”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결국 요약하자면,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마음 가는 대로 공부를 하다 보니 위상수학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재미있어서 꾸준히 하게 되었다. 나름 여러 가지 연구 결과도 내 보았으니, 더 이상 “나는 뭘 해야 하지” 같은 고민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한 개인이 꼭 해야 하는 분야, 혹은 한 개인에게 가장 잘 맞는 분야 같은 것은 허황된 존재인 것 같다. 누구나 두루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아직 모르는 숨겨진 베스트 초이스”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뭘 할까, 나는 뭐에 관심이 있을까”같은 고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고민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고,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