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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아무생각

일과 삶

멀게만 느껴졌던 박사과정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떠날 때가 되니 생각도 많아지고, 왜 이런 고민이 이제야 들까 하는 것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장의 나의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오진 않을 테지만, 앞으로의 내 삶의 자세나 계획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최근에는 오후 5~6시쯤 하던 일을 멈추고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하고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나름 진지한 이야기까지도 하고 술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경험을 더러 했다. 썩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 이런 하루는 나에겐 생소했다. 유학 준비를 같이 해서 이번에 같이 출국하는 대학 친구와 산책하며 아래의 사진을 찍었다. 삼성역 즈음에서 출발해서 한강 따라 좀 걸었는데, 약간 샌프란 느낌도 나는 것이,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가 될 것 같다.

이런 게 퇴근이 있는 삶이라는 건가, 이런 게 워라밸이라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일이라고 함은 수학연구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혹은 간혹 강의 비슷한 걸 하거나, 그런 류의 것들이다. 그렇기에 명확한 출퇴근도 없고, 보통 주당 100시간 정도 일을 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을 자거나, (수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등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굴리거나 그리고 있다. 평일과 주말의 구별도 크게 의미 있지 않으니 주당 100시간이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을 터이다.

그동안 그런 내 일상에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숨겨뒀던 큰 돈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주위에서 몇 번 들려왔던, 저녁이 있는 삶, 워라밸이 있는 삶, 퇴근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감이 오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어떠한 삶을 살아온 거지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기도 하다. 일 외적인 거라고 해봐야 운동 좀 하고 산책 좀 하거나 사람들하고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먹으며 수다 떠는 게 다였으니 말이다.

많은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내가 삶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루일과를 보낼지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그 시점에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장에 나는 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이야기하고, 생각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큰 희열을 느낀다. 물론 혼자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즐겁고, 누군가가 쌓아놓은 이론을 내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음미하는 것도 너무나 즐겁다. 하긴, 그러니까 주당 100시간 그러고 있긴 했겠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많은 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하다보면 나도 결정해야 할 때가 올 것 같다. 여러 질문들로 고민이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장 간단하게는 앞으로도 계속 주당 100시간 저렇게 살아도 나는 지금의 즐거움과 희열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다. 몇몇 현실적인 문제들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당장에 보이지는 않는데, 뭐 어차피 이건 당장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넘어가자.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향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을 것 같다. 만일 내가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나는 주당 100시간 저렇게 일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할까. 머리는 잠시 비워두고 가족들과 따뜻한 밥을 먹고 함께 한강도 산책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친구들과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시시콜콜한 얘기에 히히덕거리는 시간이 그리워지는 시점이 오지는 않을까.

유학을 며칠 앞둔 지금 이러고 있는것도 적잖은 스트레스이기는 한데, 박사과정 중 위와 같은 고민을 하며 무언가 결정을 내리게 될 것 같다. 물론 내가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이라면, 커리어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도 없고 일 좀 덜해도 학자로서 사는 데에 별 지장은 없을 테니 어렵지 않은 결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닌 것 같으니 벌써부터 감정이 복잡해지고 있겠지.

이런 류의 고민이, 많은 경우 "학계에 남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좋은 학자로 성장하고싶은 열망이 강하지만, 박사과정을 마쳐갈 때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그 이후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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