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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아무생각

정의

최근 지도교수님과 식사를 하던 중 교수님께서 아래의 구절을 인용하셨다.

Statement is more important than its proof. Definition is more important than everything

 

수학적인 맥락에서 하신 말씀인데, 결국 어떤 명제에 대한 증명 자체보다는 그 명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정의를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옳은 정의를 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낯설게 들릴 수 있는데, 수학에서 무언가를 정의해야 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고, 그때마다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사고하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류의 질문, 즉 무언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꼭 수학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에겐) 중요하게 다가오고는 한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혹은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저 떠올려볼 때면 나는 (혹은 우리는) 직관에 가장 먼저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바다를 생각해 보았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있지만 과연 바다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물의 집합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테고, 파도가 존재하는 물의 집합이라고 하기에는 바다라고 생각되지 않는, 파도가 존재하는 물의 집합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처럼 무언가를 "정의하는 과정"은,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쓱쓱 그려놓은 것을 추상적이고 명확한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정의에 기인하여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무언가를 정의하는 문제 중 가장 중요하고 어렵게 느끼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좋은 수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좋은 수학자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뭐 간단히 답을 하자면 수학 혹은 수학 커뮤니티에 기여할 수 있는 수학자가 좋은 수학자이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그 "기여"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수학자들의 스토리를 듣고, 또 주위에 내가 존경하는 수학자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남들이 풀지 못한 문제를 풀고 논문을 쓰는 것이/것만이 꼭 좋은 수학자의 자질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최근 들어 "좋은 수학자"를 상상했을 때 떠오르는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있는 수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물론, 이것이 좋은 수학자를 정의하는 방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당장의 나는 좋은 수학자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나만의 사고방식이 있는 수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다. 이러다 언젠가는 스스로를 좋은 수학자라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위에서 뭔가 말하긴 했지만 사실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긴 하다. 당장의 나는, 뭐랄까 내가 수학을 생각하는 과정을 곱씹어 보면, 무언가 공간적인 상상을 하는 것에 좀 친숙한 것 같고, 그 안에서 그림을 그려놓고 열심히 상상하고는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내 아이덴티티라면 그렇겠지만, 지금의 순간에선 그저 내게 익숙한 하나의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를 알게 되는 때가 오겠지.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한없이 좋은 사람이고픈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매일매일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고 싶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잘 모르겠어서, 그냥 솔직한 생각, 감정, 마음 그대로 내비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들이 기대된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면 좋겠고, 한없이 좋은 사람이고 싶다.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매 순간에 감사하며 솔직하게 시간을 보낸다면 좋은 사람에 가까워질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너무 정의하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아도 될 것도 같다.